박희권 대사의 "콜럼버스와 도전정신" 기고문이 2.15 문화일보에 게재되었으니 다음 링크에서 자세한 내용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한국인이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필자는 대사관을 방문하는 국민에게 한·스페인 관계를 설명할 때 항상 위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이(또는 조선 조정이 지원하는 외국인이) 신대륙을 발견했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의 활동 반경은 훨씬 확대되지 않았을까? 한국어는 5억 명의 사용 인구를 가진 유엔 공용어가 되지 않았을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신중을 요한다. 일방의 발견과 정복은 상대방의 식민화와 재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 발견은 대항해 시대를 열고 근대화의 계기를 마련한 인류 역사상 획기적 사건이었다. 대항해 시대 이래 세계의 바다는 서양이 지배하게 되었다. 신대륙의 금, 은, 설탕, 원면 등 풍부한 자원이 유입됨에 따라 유럽은 산업혁명을 이루고 근대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세계사의 축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였다.
그렇다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도전정신이었다. 콜럼버스의 항해 동기는 3G로 요약된다. 금(Gold), 영광(Glory), 신(God)이 그것이다. 그러나 3G를 추구하는 항해는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사람에게 콜럼버스의 항해는 무모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지구는 둥글다’는 가설은 당시로선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자 도전적 사고였다. 또한 장거리 항해란 극한의 고통과 위험을 의미하였다. 악천후 및 해적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당시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괴혈병은 많은 선원의 목숨을 앗아갔다. 선상반란 가능성도 항해 내내 콜럼버스를 괴롭혔다. 항해 중 콜럼버스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불안해하는 선원들을 달래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선원들이 선상에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두 종류의 항해일지를 유지하였다. 하나는 자신이 계산한 진짜 거리를 기재한 일지이고, 다른 하나는 선원들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실제보다 짧은 거리를 기재한 일지였다.
변화는 위험을 수반한다. 위험은 과거보다 나아지려는 노력에 반드시 뒤따르는 요소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려는 도전정신 없이는 새로운 발전을 추구할 수 없다. 미래의 발전을 위해 현재의 평안을 버린 콜럼버스의 도전정신이 신세계 발견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무주지(terra nullius)가 없다. 세상의 모든 땅은 발견되고 정복되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영역이 신대륙 발견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빅 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무인자동차, 로봇, 드론 등 자동화와 연결성의 극대화를 특징으로 하는 산업혁명 4.0이 인류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바꾸고 있다.
육지, 바다, 하늘 및 외기권에 이어 ‘제5의 공간’으로 불리는 사이버 공간은 글로벌 시대에 개인 간 연계성을 증진하고 있다. 인류의 삶과 일의 무게중심이 상품, 서비스와 아이디어를 거래하고 소통하는 사이버 공간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물이 인터넷과 연결되는 만물 인터넷(Internet of Everything)은 비즈니스와 결합해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하고 산업, 기업과 소비자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구를 넘어 무한대의 우주도 호기심과 상상력의 원천이자 미래의 부를 창출하는 공간으로 펼쳐지고 있다. 500여 년 전 한국인이 신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글로벌 시대에는 새로운 무주지를 발판삼아 재도약하는 한국을 기대하는 까닭이다.
시작은 기존의 사고와 틀을 깨는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도 그렇게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다.
◇박희권(60) △법학박사(국제법) △제13회 외무고시 △런던 소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연구원 △조약과장, 국제법규과장 △주제네바공사참사관 △청와대 국가안보실 정책조정관, 대일외교전략팀장 △조약국장 △주유엔 차석대사 △주페루 대사 △주스페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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